지난해 봄, 나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다. 떠나기 전에는 한적한 휴양지에 가서 푹 쉬다 오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 푹 빠진 큰아이에게 못 이겨 유적지로 가게 됐다. 그렇게 하나하나 둘러보는 동안, 예상을 뛰어넘는 감동에 피로가 녹는 듯했다. 그건 문화유산이 가진 켜켜이 쌓아온 세월이었다. 무수한 시간을 넘어선 고고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을 직접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새로 만든 것이 아무리 편리하고 근사해도 문화유산에 비할 수 있으랴. 지구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문화유산의 가치가 확연히 다가왔다.
지난 2023년 12월 경복궁 담장 낙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일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고 나 역시 무척 안타까웠다. 그 소식을 접하고 곧장 공사 중인 현장으로 가봤다. 훼손된 담장에 가림막이 쳐진 걸 직접 보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동시에 외국인 친구가 '경복궁은 어느 곳보다 한국적인 분위기가 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뿌듯한 마음에 친구와 함께 경복궁을 자랑하며 걷던 생각까지도. 그런 까닭에 외국 친구에게 경복궁 담장에 생긴 낙서를 말하기 속상할 만큼 부끄러웠다.
☞ <경복궁 담벼락 훼손 현장 직접 가보니> 정책브리핑 기사('23.12.27) 바로가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경복궁 담장은 1차와 2차 보존처리 작업을 통해 마무리를 했다. 지난 1월 2일 최종 보존처리를 마친 경복궁 담장을 찾았다. 여느 때 같이 경복궁에는 국민, 외국인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담장으로 향했다. 훼손됐던 경복궁 쪽문과 영추문의 담장은 두 차례 보존처리를 통해 말끔하게 복구돼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우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엿보였다. 수모를 겪어서였을까. 강화된 CCTV나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안내문들도 눈에 띄었다. 직접 공사과정을 본 건 아니지만, 그 노력이 대단했으리라.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문화유산은 어떻게 보호되고 있을까. 무엇보다 제 모습을 찾기 위해 들인 수고를 알면 문화유산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더 커지지 않을까. 이와 관련한 여러 담당자(복원정비과 및 경복궁관리소,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및 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 등)들과 서면으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Q. 당시 훼손 소식을 듣고 국민 모두가 놀라고 마음 아파했는데요. 담당하셨던 만큼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을 것 같습니다.
A. 이 소식을 듣고 사실인가 싶을 만큼 믿기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걸 어떻게 지워야 할까, 소식을 들은 국민들 충격이 클텐데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어요. 곧바로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와 상의해 최대한 빨리 지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장에서 낙서를 보니 참담했지만 느낄 새도 없었지요. 경복궁관리소,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담당자들과 현장작업에 관해 계속 논의했었고요. 두 번째 사건은 더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런 사건이 반복되었다는 점이 충격이었고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Q. 경복궁 담장 보존처리를 하며 어떤 점에 가장 중점을 두었을까요?
A.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는 것이 문화유산 수리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문화유산을 훼손 전 상태로 회복하고 수리로 인한 추가적인 변형이나 훼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경복궁 담장의 경우, 낙서를 완전히 제거하고 또 다른 훼손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 빠른 보존처리로 국민에게 경복궁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았음을 보여드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방법을 고려했어요. 스프레이 낙서는 약품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빼내는 것이 적합한데요. 추운 날씨 때문에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않아 좀 당황했고요. 레이저 장비로 석재 표면의 스프레이 성분을 제거하는 테스트도 했었어요. 이건 효과가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걸리겠더라고요. 차선책으로 스프레이 낙서가 된 석재 표면을 미세하게 제거하는 블라스팅이나 모터툴을 사용해보기로 했지요. 다행이라면 경복궁 담장 표면에 문양이 없고 석재 표면의 거칠기를 고려하면 추가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결국 석재 표면 상태나 낙서(글자)의 크기 등 구간별 차이를 보며 방법을 달리해 진행했습니다.
Q. 보존절차를 위한 논의도 많았을 텐데요.
A. 진행에 따른 전문 인력 투입과 구체적인 처리 방향을 논의했는데요. 보존처리 첫날 늦은 저녁까지 기존의 방법을 테스트한 후, 쉬지 않고 모두 모여 보존처리 방법론, 필요한 인력과 장비, 역할분담 등을 상의했습니다.
Q. 모두 한마음으로 피로를 이겨내며 열심히 하셨다고요.
A. 사명감이랄까요. 그때는 모두 이걸 지우고야 말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 같았어요. 결과적으로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효율적으로 보존처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이를 위한 작업환경과 언론이나 전문가, 범죄발생에 따른 수사협조 등 대내외적으로 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진 것 같습니다.
Q. 어려웠던 점도 있었을텐데요.
A. 우선 급변한 기온이었습니다. 사건 전날 최저 기온은 3.7도였지만, 당일은 영하 9.9도, 추가 사건이 발생한 날은 영하 12.4도 였습니다. 이후 일주일 동안은 영하 14.7도까지 떨어지는 극한 기후였는데요. 스프레이 특성상 시간이 경과하면 암석 광물 입자 사이에 고착화 돼 가능한 빨리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너무 추운 탓에 현장 투입 전문가의 건강은 물론, 세척 장비의 고장, 전기 시설 사용의 불편함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발생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시행착오들이 있었지요.
Q. 지난해 4월 2차 작업이 완료되었는데요. 1차 작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A. 1차 작업이 긴급 보존처리와 대규모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면, 2차 작업은 잔여 흔적을 세밀히 제거하는 후속 작업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1차 작업(영추문 주변 약 9m와 박물관 쪽문 약 25m)은 총 33m에 달하는 큰 규모였는데요. 신속한 제거를 위해 전문 인력 30여 명이 투입되었어요. 겨울이라 환경 제약이 있어 화학적 방법과 물리적 방법을 병행해 진행했습니다. 응급보존처리 위주로 진행, 전체 공정률 약 80% 수준에서 마무리됐지만, 육안으로 일부 흔적이 확인돼 후속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2차 작업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습니다. 1차 작업 후 흔적이 남은 일부 구간만 하면 됐거든요. 전문 인력 14명만 투입, 화학적 방법을 사용해 진행했습니다. 1차와 2차 작업 사이인 약 3개월간 매주 1회 석재 표면 상태를 모니터링 하고 예비실험을 통해 효율적인 제거 방법을 고심했어요.
Q. 당시 CCTV 등 순찰을 강화해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후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A. 문화유산 훼손의 재발 방지 및 궁궐 담장 외곽 관리를 위해 41대의 CCTV 설치해 사각지대를 없애고 담장 외곽을 상시 모니터링 하며 안전관리원 8명이 야간순찰을 하고 있습니다. 낙서가 악의적이라기 보다 문화유산 인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배너와 안내판 등을 설치했고요. 관람권과 안내방송 등을 통해 낙서가 국가유산의 훼손 행위에 해당한다는 점을 알리고 있습니다.
Q. 보존처리 과정에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A. 많은 분이 큰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주셨어요. 지나가다가 핫팩을 주시거나 붕어빵을 사서 오시기도 했고요. 낙서 테러 범인과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주변 편의점을 들러 따뜻한 음료 10여 병을 사서 저희에게 전달해 준 일도 있었네요.
Q. 문화유산의 가치를 한마디로 한다면요?
A. 그 속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있습니다.
Q.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국가유산을 잘 지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공동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한 관심과 발길이 이어진다면 국가유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있을 것입니다. 함께 해 주세요.
담당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시 기사로 접한 고생은 일부분이었던 듯싶다. 기술적인 문제도 힘들었겠지만, 문화유산이 훼손된 충격과 신속한 낙서제거를 위한 노력이 말로 다 못할 만큼 컸으리라. 이야기를 듣고 함께 현장에 간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허민 기자와도 관련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유치원 때 처음 경복궁에 왔는데 아파트와 다른 점이 신기했다"고 말했다. 둘다 우리가 먼저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실히 체감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우리는 문화유산을 통해 과거로부터 역사, 전통과 가치관을 공감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받는다. 또 문화유산은 관광과 같은 지역 경제 수익 창출은 물론, 국민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안겨준다. 문화유산은 이러한 점을 담아 선대가 우리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 앞으로 문화유산을 보면서 그 안에 녹아있는 옛 선조의 얼도 함께 느껴보면 좋겠다. 또 우리가 귀하게 여긴 문화유산이 우리 후대에까지 잘 관리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즐겁게 보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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